오랜 기간 제주의 풍광에 홀린 듯 작업해 오던 저의 눈에 제주는 이제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네 번째로 진행하는 개인전 “알롱 달롱 탐라 산수”에서는 제주의 기원인 화산활동, 이로 인한 물의 흐름과 동식물을 관찰하여 디자인적 조형요소로 표현하고, 이상화된 자연을 산수<산/물/바위/나무>로 표현하였습니다.
어릴 적 엄마는 종종 거실에서 이젤을 펴 들고 그림을 그렸다. 몇 없는 기억 중 하나 남은 것은 유화 특유의 냄새와 이젤 너머로 보였던 엄마의 발치다. 최근 여고시절 내가 미술학원에 다닐 무렵 잠시 쓰기도 했던 엄마의 오래된 나무 화구통을 물려받았다. 물려받았다기보다는 달라고 조른 것이 맞겠다. 엄마는 큰 미련 없이 주셨으나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엄마가 다시 붓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훨씬 크다.
며칠 전 초등학생 1학년의 반을 보내고 있는 정우에게 책상을 마련해주기위해 서귀포에 위치한 가구점에 들렀다. 훨씬 어릴때에는 아이 책상의 필요성을 느끼기는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무엇보다 방을 잘 꾸며주고자하는 마음이 컸던 듯 하다.
아이가 7살 가을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학교 근처의 마당이 아름다운 2층의 붉은 벽돌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1층에는 거실과 주방이, 2층에는 방이 2개라 아늑하고 남향은 아니지만 볕이 잘 들어 따뜻한 집이었다. 어릴때부터 일찍이 독립한 탓에 이사와 전셋집에 지친 신랑은 이제는 정착하지 않겠나 싶었고 고심끝에 정우의 방과 어울리는 책상을 주문제작 하려 했었다. 방은 직사각형의 한변이 긴 형태라 기성 제품을 놓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주문제작이 흐지부지 되면서 결국 입학후에도 책상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정우가 제법 앉아서 연필을 잡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책상을 마련해주는 일이 더 늦어지면 안되겠다 싶었고 우리는 가구점으로 향한 것이다.
그곳은 따뜻한 느낌의 묵직한 원목으로 세련된 라인을 여럿 갖고 있는 프랜차이즈 가구점이다. 적당한 사이즈의 책상이 마침 하나 있었고 정우 또한 좋아했다. 그리고 계산을 하려는 찰나 신랑이 화장대를 사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안방의 한쪽 벽면에 쏘옥 들어갈 것 같은 앙증맞은 크기의 차분한 원목 화장대였다. 평소 화장을 잘 하지 않는 편이고, 화장대에 대한 로망같은건 없었는데 신랑은 “전부터 계속 사고싶었다.”고 말했다. 마음이 이상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책상과 화장대는 바로 배송이 왔다.
정우는 그날 책상 위에 오래 전 채집한 뿔이 멋진 (죽은)수컷 사슴벌레 를 가장 먼저 두었다.
나는 화장대의 작은 서랍에 신랑의 오랜 안경들과 젊은시절 착용했을 것 같은 은색의 묵직한 금속 시계 두 개를 곱게 놓아 두었다.
작가라는 호칭을 일부러라도 부여해서 엄마 김초희와 작가 김초희를 살아보던 날들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로서의 삶의 흐름이 강해 작업의식이 흐려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나는 SNS에 올리던 나의 작업물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수업 또는 일상과 분리해보았다. 그제야 나는 작가의 호칭을 떼어내고 온전히 나의 이름 김 초자 희자 석자로 작업물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5월 26일나의 작업물들을 ‘천연염색화’라 이름붙였다.
며칠간 내린 폭설에 신게된 무거운 등산화 때문인지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계단을 내려가는 길이 힘이 들었다. 영정 사진을 보고 난 후에도 나는 슬픈 감정이 들거나 눈물이 나지 않아 이상할 따름이었다. 사진 속 언니는 너무 밝기만 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내게 꽃을 얹고 인사하는 법을 혜광님이 도와주셨다. 옆에 앉은 유림 언니에게 고심고심하여 내뱉은 말은 “언니 이게 진짜인지 잘 모르겠어요~”였다. 언니는 원래 그래~ 나도 그래~ 비슷한 말을 내뱉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즈음에는 순간순간 어지럽고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언니의 하얗고 말랑말랑한 손은 난로만큼이나 따듯했다. 입구에는 소리없이 나오는 눈물을 고운 손수건으로 연신 닦고있는 현정언니가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괜찮다는듯 마른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는 또 손을 맞잡아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 뿐이었다. 앙상히 마른 어깨와 맞잡은 손에는 힘이 없어 핏줄이 다 튀어나와있었다. 주변에는 제주의 몇몇 동료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고 폭설에도 단숨에 내려와준 원주님과 서울분들이 신랑과 함께 일해주고 있었다 .
12월 30일 폭설이 내렸다. 8시 즈음 정우와 잘 준비를 하려는데 신랑에게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듣기에도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신랑은 술을 마신터라 내가 운전대를 잡고 정우와 함께 제주대학교 응급실로 향했다. 지난 차사고때처럼 언니들이 응급실에서 곧 나올 줄 알았다. 그때부터 이틀이 지나도록 나는 실감을 못했던 것이다. 신랑은 다음날 회사에 이 사실을 알리는 순간 눈물이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통화를 할 때 간간이 목소리가 떨렸고 간신히 이성의 끈을 잡고 있는 듯 했다.
오늘 1월 1일, 신랑에게 민지언니 잘 보내주고 오라고 한 말은 나에게도 작별인사와 같았다. 준비없이 맞이한 이별에 함께했던 순간들을 되뇌이고 글을 써봐도 나는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상태이다.
신랑은 매주 수목금 출장을 간다. 최근에는 CTO로 승진되면서 -2020. 9. 30- 주말에도 틈만나면 거실에 놓아 둔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한다. 매우 축하해야 마땅할 일인데, 고된 일이 늘어나 마음의 짐이 무겁다. 그런 여보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자 출장 간사이 ‘정우의 칭찬할 일’을 모아본다. 혹여나 잊어버릴까 매일 한개씩 적어두고는 신랑이 돌아오는 날 비행기를 탈 때 즈음 문자를 보내주었다. 제주로 돌아오는 피로한 몸이 한결 가볍기를 바라며.
1.설거지를 도와주었어요 (옆에서 헹구기를 해줌) 2.차에서 휴대폰을 보지 않기로 한 약속을 지켰어요 (등원길에 보조석에서 유튜브로 동요를 듣던 중, 광고를 ‘건너뛰기’ 해준 후 영상을 보지 않고 뒤집어서 제자리에 놓음) 3.반찬을 골고루 먹었어요 (멸치볶음, 연근) 4.저녁으로 떡볶이를 먹는데 한입 먹자마자 “아빠껏도 남겨놘?”이라고 말했어요 (출장가면 아빠이야기를 많이 하는 정우)
집으로 돌아오는길, 한껏 칭찬해주는데 으쓱하며 이마트로 가자는 정우. 그는 결국 메가리자몽Y를 손에 넣었다.
제주에 온 이후로는 가족들과 통화나 톡으로 안부를 전한다. 얼마전 아빠는 틀니를 하려고 치과를 다닌다고 했다. 어금니를 모두 뺐다고. 수화기 너머로 상추가 먹고싶어 조금 뜯어 먹어봤는데 맛을 하나도 모르겠다 말씀하셨다. 젊은시절 맛동산을 제일 좋아할만큼 이 하나는 튼튼하셨는데 어쩌다 잇몸까지 약해지셨는지. 속상한 마음 감출길 없다.
올해는 미뤄왔던 천연염색 작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조금 더 자연의 색에 다가선 것 같고 또 아크릴과의 접목도 서서히 자리잡히는 것 같습니다. 내년도 달력으로 선보이는 작품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의 초기작으로 해석하면 좋을 것 같고, 한달 한달 꾸밈없이 작업하였습니다. 육지든 제주든, 또다른 나라의 하늘아래에서도 ‘그래, 그날은 풍경이 이랬지. 이런 색깔이었지!’ 하고 보아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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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은 작년에 만든 방식 그대로 나무받침에 끼워두는 형태입니다. 다만 작년에 구매한 분들은 나무받침을 또 안사셔도 되게끔 제거한 버전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볼때부터 업무 전화를 받는 “여보세요~” 소리를 좋아했었다. 2013년 당시 우린 같은 사무실 공간을 사용했는데, 신랑은 저 너머 창가자리 옆팀의 팀장님이었다. 창이 커서 햇살이 많이 너머와 종종 눈이 부시기도 했고, 컴퓨터만 쳐다보는 일이다 보니 눈의 피로를 핑계삼아 창가를 보며 저 너머 신랑이 있던 자리를 슬며시 보기도 했다. 꼬불꼬불한 윗 머리카락만 보이는 그의 “여보세요~”소리는 늘 내 귀를 간질거리게 했다. 경상도 여자인 내게 서울말로 “여보세요~”라고 하는것이 어쩜 그렇게 멋있던지.
지금까지도 종종 운전을 할때나 밖에서 업무전화를 받으면 그렇게 멋있다. 특히나 후광이 비치는 날에는 더더욱!
2016년 말, 나는 우연히 천연염색 작업을 하게되었다. 작품은 거듭할수록 서서히 정리되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일년 후 몇몇 작품에서 색이 옅어지는 사례가 발생했다. 이후 천연염색은 포기하고 일년간 아크릴화로만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해동안의 작업물을 정리하고 전시준비를 하던 중 나는 이전에 작업했던 천연염색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그 색이 물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아름다웠다. 물감으로는 자연 그대로의 컬러를 나타낼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는 유년시절 그림으로는 먹고살지 못한다는 말을 종종 듣고 살았다. 엄마는 그랬다. 배운적 없는 그림솜씨가 어마어마 했지만 그걸로는 먹고 살 수 없었다. 엄마에게 그림은 아쉬움을 달래듯 그저 취미로 남았다. 그러니 우리 가족에게 그림은 사치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내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여고시절, 내가 미술학원에 다니는 것은 부모님께 적지않은 부담이었다. 물감 살 돈이라도 아끼고자 3년 내내 연필 소묘만 했다. 결국 그림으로는 돈을 벌지 못한다며 디자인과를 선택하여 20대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디자인은 나와 맞지 않다고, 이 길을 가지 않겠다 생각하며 졸업했다. 그리곤 결국 그림이라며 되돌아오던 지난날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기가 생기자 그림은 더욱 그리기 힘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듯 태교삼아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했다. 아기가 잠들면 새벽에 겨우 그린 그림을 갖고 프리마켓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림은 다시 저 멀리 달아났다. 안개속에 있는 바다와 같았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꿈같은 것이었다. 신랑과 나 그리고 아기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다행히 최근 아이가 어린이집을 오후까지 다니기 시작하면서 모든것이 변했다.
아이과 떨어져 있는 여유시간동안 나는 온전한 나의 삶과 마주했다.
얼마전에 할머니 상으로 영천에 다녀왔다. 그러니까 정우한테는 증조 할머니인 셈이다. 외 증조할머니. 내 기억속 할머니는 담배를 태우시며 아궁이를 살피는 건강한 분이셨다. 그런데 결혼전인가 언젠가부터 누워계시더니 병원을 왔다갔다 하며 어빠가 간병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토요일이었다. 여느날과 다를 것 없이 우리는 인디고에 있는데 신랑이 나의 언니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다음주면 영천에 한번 들를 참이었다. 어버이날에 뵙지 못해 적당한 때에 비행기표를 끊어두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일주일을 못기다리시고 눈을 감았다. 신랑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라고 얘기를 했을때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났다. 난 엄마를 고생시킨 할머니를 좋아하지도 않고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나오는것이 왠지 이상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빠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산랑은 잦은 출장으로 비행기표 예매 방법은 누구보다 잘했다. 마침 성수기고 연휴가 낀 주말이라 아무리해도 표가 나지 않았는데 신랑은 표를 구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영천으로 향할 수 있었다.
정우는 왠일인지 영천에서 일주일이 넘도록 잘놀고 잘먹었다. 컨디션이 좋아서인지, 많이 커서 그런지, 본인이 좋아하는 이불 -엄마가 결혼선물로 사준 알레르망 이불이다. 사각사각하고 시원하다- 을 가져가서인지는 알수 없지만 잘 먹고 잘 지내주었다. 장례식장에서도 산소에서도. 다행히 개월수에 비해 말을 잘하는 정우는 처음보는 온 친척들 사이에서 귀염둥이가 되었다. 정우덕에 검고 흰 곳에 웃을일이 생겼다. 다행이었다.
정우는 금새 말도 생각도 늘었다. 일주일새 몸무게도 12키로에서 13키로가 되었다. 제주에선 그렇게 늘지 않던 몸무게였다.
돌아와서는 영천 사투리를 써서 여간 당황스러울수가 없다. 게다가 다시 미운 네살로 돌아오려고 한다. 엄마는 많이 힘들다.
어제같은 날엔 무조건 금능이었다.
전날부터 나는 두근두근 설레는 맘으로 수영복, 여벌옷, 씻을물, 간식 등을 준비해두었다.
한편, 정우는 새학기부터 다니기 시작한 어린이집을 가기 싫어한다. 어제는 입구에서부터 들어가기 싫다고 울며불며 떼쓰다 결국 야외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삼십분 정도 놀게되었다.
그리곤 바로 나와함께 금능으로 향했던 것이다.
바다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어제는 날이 좋아 놀이터에서도 놀고 바다에서도 엄마랑 신나게 놀았지만 오늘은 꼼짝없이 12시까지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했다.
잘 할 수 있을지 ..
나는 정우를 재우고 함께 동행하기로 한 바라언니의 작업실에 들렀다. 한참 수다를 떨다보니 벌써 공연시간이 코앞이었다. 공연은 네시인데 가려면 삼십분은 걸릴터였다. 언니는 공방문을 닫을 수 없어 나를 데려다 주기로만 했다. -언니도 정신이 없었던터라 공연이 오늘인지도 몰랐단다- 쌩 달려 도착한 공연장에선 이미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오프닝을 놓친건 아쉽지만 언니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이 우선이었다.
공연은 결혼 전 보았던 ‘유희열의 스케치북’ 이후 처음이다. 재주소년의 목소리는 mp3로 듣던 그 소리와 너무 똑같아 놀랐고, 공연장이 너무 추워 -반짝반짝 지구상회는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공간이다- 소매를 내리는데 가끔씩 보이는 그의 손목은 너무 섹시해서 반했으며, 마지막 곡의 첫 기타소리가 가슴을 저리게 하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어 신랑을 불렀다. 다행히 정우는 그동안 잘 잤다고 한다.
한편,
정우가 처음으로 말한 문장은 “귤 주세요.” 다. 보사노바를 듣고 자란 ‘루시드폴’이 농사지은 귤을 한입 먹고는 “뀰 두떼요.” 라고 말했다.
하늘이 맑은 무척이나 좋은 날이었다.
신랑의 지인이 -이제 나의 지인이기도 하다- 제주로 여행을 왔다.
우리는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왼쪽에는 처음보는 카페가 있었다.
그것이 인디고와의 첫 만남이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나의 첫번째 전시인 태교전시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생각해보면 무턱대고 연락해 내 그림을 전시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너무 좋다고 말씀해주신 사장님도 참 신기하다.
지금도 위안이 필요할 땐 어김없이 인디고를 찾는데 어느순간 나의 집에 온것같은 느낌이 들던때가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때문인지 여사장님의 예쁜 미소때문인지 그윽한 커피향과 맛있는 케익 때문인지 모를일이다.
어쩌면 운이 좋아 갓 구운 스콘을 바로 먹을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일지도..
바라언니와의 인연 또한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카페 중앙에 자리한 테이블에는 각종 서적과 꽃 등이 자리해있는데 그 곳에 고운 그릇이 있었다.
그렇다.
바라언니는 그릇을 만든다.
언제고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니 토요일 오전 한가로운 주말 아침에 다같이 볼 기회가 있었다.
여리여리하지만 강단있는 손 끝이 그녀의 그릇과 닮았다 생각했다.
어제는 그간 작업해오던 천연염색 아크릴화의 문제점을 눈으로 확인한 날이었다.
제주 동쪽 샵에 납품한 그림이 너무 멀어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관리가 잘 안되어 철수를 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이었는데 두 점의 그림에 색이 많이 날아갔다.
안타까움은 오래 남았다.
천연염색은 빛에 약해 색 보존이 어렵고 변색이나 이염이 잘된다. 그것이 천연염색의 매력이자 취약점이었다.
그렇기에 어제는 왜인지 바라언니가 무척이나 보고싶었다.
이런저런 작업의 고충을 얘기하고나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물론 여러가지 조언도 함께 얻었다.
바라언니에게는 마음의 평안과 함께 시원시원한 그녀의 성격과 닮은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정우는 이제 17개월에 접어들었다.
그간 아빠의 출근과 출장에는 익숙해진 터,
-익숙하긴 해도 출근하는 아빠와 떨어지기 싫은 정우다-
꼬박 24시간이 넘는 나와의 이별은 첫 시도다.
나와 정우의 이별 이유는 바로 나의 육지여행 때문이다.
여행 계획은 아래와 같다.
1. 아영이의 신혼 집들이, 세종이다.
2. 언니의 이직으로 인한 이사, 청주 공항에서 15분 거리다.
때마침 두 사람의 집은 꽤 가까운 거리였고 이동역시 민지가 차를 몰고 온다니 안갈 이유가 없다.
다만 정우가 걱정일뿐.
하지만 쿨한 여보덕에 그리 고민하지 않고 비행기 표를 끊게 되었다.
집에서 나오는 길에 정우는 아빠가 또 가는 줄 안 모양이다.
아빠곁을 떠날 생각이 없는 정우는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정우야 오늘은 엄마가 간단다 ..
정우가 옆에 없으니 편했다.
비행기 탈때도 편했고,
커피를 마실수도 있었고,
밥을 먹을때도 온전히 식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언니를 만나 잠깐이었지만 알찬 시간을 보냈고
아영이와 민지도 만나 신나게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런데 나는 종일 뭔가 허전했다.
페이스타임을 했다.
정우는 나를 보자마자 서럽게 울어댔다.
흐어어어엉
나도 눈물이 났다.
내가 욕심부려 정우의 마음에 큰 상처를 냈나 싶었다.
외출로 오전에 한시간가량 낮잠을 잔 후
다섯시반이 되어서야 다시 잠든 정우였다.
-낮잠은 보통 12시쯤부터 두시간 쭉 잔다-
여섯시 반,
정우는 정확히 한시간을 더 잤다.
그때 난 정우의 산모수첩을 정리하며 출장간 신랑과 통화중이었다. 찡찡 소리가 나길래 봤더니 벌떡 일어나 걸어오려고 했다.
얼른 안아 토닥였지만 정우의 컨디션이 좋지않아 얼른 같이 저녁밥을 먹기로 한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아기 식탁의자에 앉혀놨다.
정우는 주방에 둔 귤 두개를 보고 당장 달라며 세상 서럽게 울었다.
하지만 줄 순 없었다.
맛있는 저녁을 위해서.
엉엉 눈물콧물 흘렸지만 오구오구 엄마가 빨리 저녁 줄께~ 대답만 해줄 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 귤을 까주었거나 스트레스를 받아 짜증을 냈거나 안아줬거나 했을텐데 아니었다.
그저 이해해주고 가끔 못본척도 하며 저녁먹고 귤 먹자~ 대답해줄 뿐이었다.
저녁은 유부초밥이었다. 난 카레 ㅋㅋ
-보통 출장전엔 가벼운 식사꺼리나 반찬을 쟁여둔다. 혼자 밥해먹이기 힘들까봐. 매번 눈물난다. 그런데 이번엔 출장이 길다. 무려 4일이다. 크흡ㅠㅠ-
암튼 그 유부초밥을 정우는 맛있게 엄청 맛있게 먹었다.
밥을 다 먹었는데 내려올 생각이 없다.
뒤에있는 귤을 돌아보며 까주길 기다렸다.
ㅋㅋㅋㅋㅋ
짱귀엽다.
먹는동안 설거지를 얼른 끝내니 정우가 또 돌아봤다.
아 귤 두개였지…
똑똑한데…
정우는 귤을 두개나 먹고 나서야 만족한 응가를 뽀직 싸보였다.
그런데 최근 예전 작품이 물이 빠진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집에서 몇달째 보관한 염색한 천은 색이 바래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내 손을 벗어난 작품은 공기 산화와 햇빛 노출 등으로 인해 결국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도 그런것이 염색을 확실히 배우지 못한 나의 부족함도 있었겠고, 30여년 염색을 해오신 정옥기님도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졌다 하신다.
가볍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어렵지 않게 작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나의 큰 실수이자 오만이었다.
하지만 곧 나는 가슴에 무언가 두근거림이 생겼다. 무궁무진한 답이없는 이 천연염색의 세계가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상할 노릇이었다. 그간 후루룩 그리던 펜화를 좋아하던 내가 이 고생스러운 작업에 빠지다니.
행복을 강요당했다.
아가를 키우는 지금이 가장 좋을때라며 나는 엄마에게 행복을 강요당했다.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짧은 삼십인생 겪은 바로는, 지나고 보니 그때가 좋았다는 논리는 내겐 틀렸다.
도대체 지나고 보니 고교시절이 좋았다는 말은 누가 뱉은 것인가.
각각의 시에 불행이, 행복이, 슬픔이, 기쁨이 뒤엉켜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물론 좋고 나빠 흑백논리는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느니 같은 소리는 내겐 드라마에나 나오는 시간여행같은 소리일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이 가장 좋을때는 아니었으면 한다.
그렇다면 남은 일생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충분히 오늘을 살아 앞으로의 날들이 계속해서 보다 더 좋은 날이길 바란다.
오늘도 내가 끊임없이 정우를 사랑하고 또 싫어하였듯이.
사실 수선화를 알게 된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금새 수선화에 빠져들게 된 나는 당장이라도 만나러 가야했다.
여러분도 위의 저 브런치 글을 읽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은 충동이 일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신랑의 반차 찬스를 이용한 우리 가족은 수선화가 만발했다는 대정향교로 향했다.
서귀포는 햇살이 좋았고, 하늘이 맑았고, 유채꽃이 벌써 만발했고, 바람은 찼다.
넓은 마늘밭을 지나 우뚝솟은 오름 아래 향교가 고즈넉히 자리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수선화가 내게 왔다.
정우에게도 향을 맡게 해주니 사르륵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밖에서도 곧잘 걸어다니는 정우는 귀여움이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감기로 몸이 좋지 않은 신랑은 코가 막혀 아쉽게도 향기를 맡지 못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주 예전에는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있었을 것인데 이젠 가로수 아래 심겨진 수선화만 볼 수 있어 많이 안타까웠다. 시골 구석구석으로 가게되면 만나려나. 나같은 노형커에겐 힘든 일이기에 더욱 아쉽다.
이대로 돌아가긴 아쉬워 길가에 수선화 한떨기를 집까지 모셔왔다.
-신랑은 작은 꽃 하나도 꺽기 싫어하지만 나의 욕망을 꺽을 순 없었다-
벌써 두번째 맞는 결혼기념일 겸 스트레스 해소겸 우리 가족은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비행시간이 가장 짧기도 했고 -돌도 안된 아가와 함께하는 여행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다.- 난 여행지보다는 휴양지를 선호하는 편이고 게다가 일본은 어쩐일인지 한번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간 다녀온 여행지는 프랑스와 상해 정도로 여행의 폭과 깊이가 짧고 얕은 나로써는 참으로 적당한 여행지가 아닐 수 없었다. ㅋㅋ
오키나와 힐튼 차탄 리조트로 오는길은 참으로 힘들었으나 굳이 글로 담고싶지 않으니 그냥 ‘쉽지는 않았다’ 정도로 요약한다.
호텔로 가는 리무진 창밖 풍경으로 영화에서나 보던 교복입은 아이들이 나타났다. 꽤 신선했다.
힘들게 도착해 마음껏 기어다닐 수 있는 크고 하얀 침대를 보자 방방 뛰며 웃던 정우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모든 일정은 정우의 컨디션에 맞춰주었고 위 사진은 실내 수영장에서 처음으로 수영을 하고는 그대로 꿀잠을 자는 정우의 모습이다.
올해는 제주 앞바다에서 수영한번 못하고 이렇게 지나가나 했더니 오키나와에서 한을 풀고 간다.
여행내내 정우를 안아주고 신경써주며
여러모로 무리해준 여보에게 무한한 감사를…
지난 금요일이었다.
신랑이 저녁에 말하길 “오늘부터 내가 정우를 데리고 잘테니 넌 따로 자라 제발! ”
-‘제발’은 몇번 그리 말했으나 내가 여보의 말을 듣지 않고 같이 자다 계속 새벽수유를 하게 된 사건에서 비롯함-
결국 나는 신랑방으로, 신랑과 정우는 안방에서 같이 잠을 청했다.
늘 맘마를 하며 잠이들던 정우에게 아빠와 함께 잠드는것은 너무 가혹했을까.
정우는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울어댔다
몇분이나 지났을까.
어느순간 문 너머로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날 나는 오랜 꿈을 꾸었다.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아침 7시였다.
정우의 눈엔 눈물이 아빠의 눈엔 핏대가 지난 밤 사투를 그리게 하였다.
나는 부랴부랴 정우에게 젖을 먹였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정우도 좋은지 금새 베시시 웃어보였다.
이제 정우는 낮에도 안방 문을 닫고 커튼을 치면 왼쪽 품에 안겨 심장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다.
오늘 밤에는 울지않고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못하는게 없는 우리 여보야는
육아마저 나보다 잘한다. 이러한 정우의 수면 패턴을 만들어 주고는 불금을 보내러 가셨다.
오늘은 새벽에 들어와도 용서가 되는 밤이다.
사랑해요 우리여보.
패턴은 이러하다.
–
8시 샤워
샤워 후 조용한 놀이
8시 50분 안방으로 들어감
9시 반짝반짝 자장가 부르기
9시 5분 불끄고 자장가 부르기
9시 10분 잠들면 20분동안 안은채로 토닥토닥
이후엔 내려놓아도 됨
–
이상할 노릇이었다.
언제인지 울며불며 신랑에게 일주일에 두시간만 내 시간을 달라 이야기 하던때가 있었다.
아가와 떨어져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은 아가에게도 필요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신랑이 말했다.
가서 영화를 보든 그림을 그리든 미술관을 가든 아님 카페를 가던지 하라고, 다녀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다시 울음이 났다.
꺼이꺼이 울며 말했다.
“으허오어엉 가고싶은데가 없우오어엉.
혼자 하고시푼게 업스으어엉.”
나 혼자서는 가고싶은 곳도 하고싶은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여보와 정우와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었다.
우리아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을 올려본다.
어젯밤 잠들기 전 우리는 지금 이때가 제일 이쁜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막 옹알이를 시작할 무렵, 눈이 똘망똘망 해져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싶어 하는지, 우릴 보며 살짝 웃어줄때, 그 때.
정우가 좀 더 커서 논리적으로 얘기하면 안이쁘다고 한다.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신랑의 출장이 잡혔다. 피할수는 없었다.
신랑은 할 수 있는 모든것을 해주고 다녀오겠다 다짐한듯 보였다.
혼자 있을때 가장 큰 난관은 밥을 먹는 일이었는데, 밑반찬을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도록 그릇에 담아두었다. 한겹 한겹 쌓인 치즈와 김이 들어간 달걀말이도 준비해 주었다. -정말정말 맛있었다-
그 어떤 허세 가득한 음식 사진보다 나는 이 사진 한 장이 그리 아름답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정우는 벌써 태어난지 5주가 되었고, 그새 키도 몸무게도 많이 늘었다.
최근엔 밤새 눈이 말똥말똥한 녀석 덕분에 새벽내 라디오와 함께하고 있다.
내 온 신경은 날카로워져 있고 몸은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젖을 먹고 품에서 잠든 얼굴을 보면 정말 천사가 내려온 것이 아닐까하는 기분이 든다.
오늘은 날 보며 따라 웃기까지 했다.
여보가 그걸 봤어야했는데
일하랴, 집안일하랴, 아가보랴, 내 짜증 받아주랴, 이 모든것을 버텨내고 있는 여보에게 말할 수 없이 고맙다.
흰머리가 너무 많이 늘어버려 마음이 아프다.
죽을 것 같던 10시간이 지난 후 결국 우리는 수술을 택했다. 긴 시간이 허망하게도 10분만에 아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저 작은것과 마취에 취해 있던 나를 보며 신랑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했다.
미약한 정신을 붙들고 있던 내게 아가를 보여주던 것이 생각난다.
장시간의 수면부족과 산통 후로 온몸의 기력과 수분이 빠진 나는 억억 소리만 낼 뿐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아가에게 젖은 물려야한다며 아픈 몸을 겨우 옆으로 뉘었다.
아가가 품에 왔다.
2015년 크리스마스 이브.
나는 엄마가 되었고, 신랑은 아빠가 되었다.
다행히 회복이 빨라 다음날부터는 걸어다녔다.
신랑을 안으니 그제야 눈물이 쏟아졌다.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보니 그날이 크리스마스였다.
며칠 전부터 태교삼아 아영이 알려준 ebs 낭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듣고있다. -상당히 좋으니 추천한다.- http://goo.gl/YNcskn 아침마다 눈뜨기 힘들때 반수면 상태로 듣고 있으니
오늘 아침엔 신랑이 책을 한 권 가져오더니 자기가 읽어주겠단다.
출장땜에 잠잘 시간도 부족할텐데 그 새벽에 짬을내어 읽어주었다.
신랑은 목소리가 좋았다.
목소리가 많이 좋았다.
품에 쏘옥 안겨 눈을 감고 들었더니 책 내용은 점점 희미해지고 목소리만 귓가에 남았다.
신랑은 다음에 읽을 책을 소파위에 꺼내두곤 서둘러 샤워하러 갔다. 밤이 길다.
남편이 출장을 갔다.
오늘 아침 여덟시 반 비행기였다.
마침 장마라 새벽부터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어제 피곤한데 늦게 잔 탓인지 일찍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달그락 달그락 요리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남편도 피곤할텐데 일찍 깨서 내 아침을 준비해주고 있었다. 씻지도 않았는데 남편은 오늘따라 보송보송하니 이뻤다. 잠에서 덜깬 탓일까?
오늘 아침은 칼칼한 콩나물 국이다. -먹는입덧 탓인지 아침에 국을 먹어야 속이 쓰리지 않아서- 별거 안넣은것 같은데 남편이 하는 요리는 다 맛있다. 엄청 맛있다.
일곱시가 넘어 옷을 주섬주섬 입고는
어머님께 드릴 엽서와 브로치 -지난 벨롱장, 윤영님한테서 샀다- 그리고 노트북을 챙겨
남편과 함께 문을 나섰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기분으로 택시를 태워 보냈는데, 돌아와 집에 혼자 앉아 아침을 먹으며 jtbc 뉴스를 보고 있자니 쓸쓸함이 밀려왔다.
-메르스가 잠잠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서울은 여전히 불안하다-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테이블에서 화장을 하고 잠깐 사이에 동선이 모두 뒤틀렸다.
아 뽀뽀나 한번 더 하고 보낼껄..
그는 입술이 예뻤다.
조금은 매서운 눈매와 안경이 그리고 살이 붙어 동글한 얼굴에 도톰한 입술이 예뻤다. 그는 왼손으로 폰을 자주 본다.
그래서 왼편으로 기운 몸 때문에 오른쪽 얼굴을 많이 보게 되는데 머리카락부터 귓볼 턱 입술 코 눈까지 찬찬히 한참을 바라 보았다. 그의 섹시함과 귀여움은 입술에서 나오는가 싶다.
어제밤엔 일때문에 새벽 네시가 다되어 잠을 잔듯하다. 일찍자는 나를 재워주려 그가 옆에 누웠다. 심장이 뛰었다.
입덧을 전혀 안한다. 임신 8주차인데.
유전이라길래 엄마한테 물어보니 본인도 잘 안하셨다고 한다. 3개월 부터 한다나 3개월까지 한다나 잘 모르겠다며 이젠 기억이 잘 안나신다고.
하지만 나도 두어번 정도 입덧을 한것도 같다.
어느 날 아침 공복에 한 번, 언제인지 집에서 짜파게티를 먹으려고 하는데 한젓가락을 먹고는 그냥 헛구역질을 해버린 그때 또 한 번.
다행인듯 특별히 먹고싶은것도 없어서 신랑과 나는 굉장히 무난한 임신 초기를 보내고 있다.
아마 삼시세끼 잘 챙겨 먹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찌개를 끓이면 꽤 맛이 있어서 자신감 상승중이라!
며칠전에는 갑자기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잎 부분엔 빛을 못 받아서 노란 얼룩이 있는-
한손에 들고 크~게 한입 베어먹고 싶었는데 요샌 사과철이 아니라고 맛이 없단다.
아마도 어릴때 부터 사과는 일년내내 먹고 자란 탓이리라.
아, 우리 아빠는 영천에서 크게 사과농사를 지으셨다.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작아져서 남의 밭도 일구시지만.
아무튼 지금 못 먹는다니 괜히 먹고싶어졌다.
여보가 이 글을 겨울에 봐야할텐데 ㅋㅋㅋ
나는 임신이 확인되기 며칠전부터 오렌지주스가 그렇게 먹고 싶었다. 평소 오렌지주스는 입에도 안대던 나로써는 신기한 일이었다.
현석님이 보내주신 ‘퍼펙트 베이비’ 책을 보고있는데 오렌지 주스에 엽산이 많다고 한다.
때는 4월 30일쯤이었다.
검색과 지인의 추천하에 괜찮다는 산부인과에 가서 임신 검진을 받았다. 심장 소리가 들렸는데 기분이 묘했다.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엄청나게 기쁘다기 보다는 신기함과 두려움이 함께 오는, 지금까지 느껴본적 없던 이상한 감정이었다. 아마 아빠도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때 그 표정을 생각해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