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개인전 <알롱 달롱 탐라 산수>

전시 소식 알립니다.

오랜 기간 제주의 풍광에 홀린 듯 작업해 오던 저의 눈에
제주는 이제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네 번째로 진행하는 개인전 “알롱 달롱 탐라 산수”에서는
제주의 기원인 화산활동, 이로 인한 물의 흐름과 동식물을 관찰하여 디자인적 조형요소로 표현하고,
이상화된 자연을 산수<산/물/바위/나무>로 표현하였습니다.

알롱 달롱 탐라 산수 (김초희 천연색화 展)

국립제주박물관 고으니모르홀

2023. 9. 5 (화)~ 9. 24 (일) / 매주 월 휴관

오! 사과.

주제별로 하고 싶은 전시가 아직 많다.

푸른것들과

아버지의 사과 등이 그것이다.

전시명은 오! 사과.

2022.12.6

엄마의 오래된 나무 화구통

어릴 적 엄마는 종종 거실에서 이젤을 펴 들고 그림을 그렸다. 몇 없는 기억 중 하나 남은 것은 유화 특유의 냄새와 이젤 너머로 보였던 엄마의 발치다. 최근 여고시절 내가 미술학원에 다닐 무렵 잠시 쓰기도 했던 엄마의 오래된 나무 화구통을 물려받았다. 물려받았다기보다는 달라고 조른 것이 맞겠다. 엄마는 큰 미련 없이 주셨으나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엄마가 다시 붓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훨씬 크다.

2021.11

붓꽃

두어달 전 앞마당에 붓꽃을 심었다.

작업을 위해 쪽을 심을 요량으로 현관문 앞의 잡초가 무성한 작은 땅을 밭갈듯 갈았는데 -제주의 땅은 정말이지 돌 반 흙 반이라 일주일 내내 너무 힘들었다. 간혹 바위도 나온다.- 쪽만 심기 아쉬워 꽃 구근을 심었더랬다.

그러나 올 봄은 이상하게도 세찬 비바람이 강했다. 약한 잎들은 결국 꺽이고 말았고, 벼를 세우듯 나는 잎들을 모아 한데 묶어 주었는데 한번 꺽인 잎이 다시 세워질 리 만무했다. 때마침 꽃봉오리를 올린 세 꽃이 다시금 비바람에 고개를 떨구고야 말았다.

나는 조심히 꺽어와 화병에 꽂아 주었다.

애초에 붓꽃은 호주 여행 당시 추억의 꽃이었다. -시드니 플라워마켓에서 정우가 까아만 캉골 지갑을 꺼내들고 “어서 골라봐!” 하던 나의 생일 선물 꽃이다.-

화병에 툭 꽂아 식탁에 두었을 뿐인데 나는 다시 호주로 돌아간 듯 하다.

올 3월부터 받아보기 시작한 제민일보에 숨은그림찾기도 스도쿠도 있을 것만 같던 오늘 아침.

다음 여행지에서도 추억이 될 만한 꽃을 사봐야겠다.

디스커버리 퍼플과 실버리 뷰티(들여다보면 실버리 뷰티는 흰 부분이 반짝인다.)
호주 여행 당시 페트병 화병을 신랑이 만들어주었다.

미대군대

정우에게 물었다.

“정우야 미대 갈 생각 없니?”

정우가 대답했다.

“싫은데~ 군대할껀데”

굿바이 다음

서양학과를 반대하던, 먹고 사는 일이 걱정인 어른들의 조언으로 가게 된 시각디자인과에서 나는 3학년을 끝마칠 무렵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 디자인은 나의 길이 아니구나.’

하지만 디자인을 배움으로써 인생을 살아가는데에 큰 얻음이 있었으니, 바로 아름다운 사물을 분별하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다양한 서체의 아름다움부터, 그리드에 의한 정렬과 색채, 클래식의 미, 미보다 앞선 실용성, 청바지에 검은 목폴라의 잡스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외에도 실로 방대한 것들이 삶의 습관을 바꿀 정도로 내안에 깊숙이 자리해 있다.

여직 존경하는 교수님께 얻은 이러한 가르침을 이대로 놓는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용기낸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회사가 바로 ‘다음’이었다.

다음은 10년 전 홀로 제주에 내려온 까닭이었고,

많이 힘들었고,

그 안에서 신랑을 만나 참 많이도 행복했던 회사다.

그런 애증의 GMC가 이제 매각이 되어 추억이 사라진다니 꽤나 아쉽다.

천연색화

천연의 재료로 염색을 하는 대신

천연색의 우리 물감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천연염색화’라는 이름 대신, ‘천연색화’라 불러 보기로 했다.

붉은 봉채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 쓰고 나면 구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장인을 찾아가 우리의 물감을 만드는 법을 배워야하나 고민이다.

2023.1.9

삼성 홈페이지를 만들던 스무살 남짓하던 젊은 청년은 이제 제법 번듯한 자신의 방이 생겼다.

업계일을 한지 21년째 되던 해다.

생각해보면 그는 편의점 알바를 하나 하더라도 허투루 하지 않던 청년이었다.

전에는 신랑이 ‘운이 좋게도’ 처음 시작한 일이 본인과 잘 맞아서 무척이나 잘 해내었다고, 때마침 시대의 흐름도 신랑의 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하면 끝까지 해내야 하는 성격탓에 여기까지 온 것일테지.

카트라이더 하나를 하더라도 사내에서 1등을 해야하는 사람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내가 게임에 문외한이라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른다.

기껏 설명을 해봐야 오구오구 정도의 반응밖에 돌아오지 않는, 칭찬을 받을줄도 할줄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조금 미안하다.

나의 일은 언제 내 편이 될지 알 수 없는데, 상한 몸을 채 돌볼 시간도 없이 출장을 떠나는 남편을 보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건강한 음식을 만드는 것, 신랑이 돌아왔을때 아늑함을 느낄 수 있도록 집을 잘 돌보는 것, 정우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 짜쯩내지 않는 것 정도. 쓰다보니 생각보다 많은걸? ㅋㅋ

무엇보다 여보! 방이 생긴것을 매우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