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서른아홉이 되던 해

날카롭고 따뜻하기를 어지러이 반복하던 날에

오후의 햇살이 푸른 하늘 저편과 나의 상념을 옅어지게 만들던 어느 날에

나는 문득 생각했다.

자화상을 남겨두어야겠다고,

팔리지 않을 작품

팔리지 않을 작품의 영감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

그것을 결국 그리는 일은

하지 못할 말을 머릿속에 써 내려가거나

밝은 회빛 하늘에 아침부터 눈발이 날리던 이월 이십삼일

창밖의 동박새에 자꾸만 눈이 가는 것과 같은 일은 아닌가

곰팡이

작업실에 두던 작품들 뒷면에 곰팡이가 피었다.

이고지다 결국 이렇게 될 줄도 알았고.

아직은 괜찮은 작품들이라도 살리려 액자에서 작품을 분리했다. 지익-하고 작품을 떼어낼 때마다 내 마음도 하나 둘 도려내어졌는데 생각보다 소리가 경쾌했다.

진희언니에게 어울릴 초록의 작품 하나는 맡기고, 끝내 떼어내지 못한 작품 몇개가 내게 남았다.

버릴것이 쓸데없이 아름다웠다.

도원

과일 작업의 타이틀이 나왔다.

도원(桃源)

2024. 10. 12 이중섭 미술관 가는 길에

하얀 나비

선선한 날 문을 열어두고 작업을 하다가 보면 종종 하얀 나비가 날아든다. 늘 하얀 나비다.

과학의 발전과 예술

미술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시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나 며칠을 보내고서 나는 겨우 연필 한 자루 들고는 꽃그림을 그렸다. 한심하다.

인류에 위협이 될 정도로 급성장한 AI의 발전을 혹자는 사진기의 발명에 빗대기도, 혹자는 뒤샹의 ‘샘’과 같은 작품이 주었던 충격에서 해답을 얻기도 하였다.

과학자들과는 다르게 예술가는 대게 비관적이더라는 데에서 잠시 위안을 얻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과는 별개로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갈피

작업이 한 데로 모이는 것 같지 않아서 걱정이다.

푸른 누드와 쪽 작업 / 풍경과 패턴 / 과일 작업과 스케치

모두 좋아하는 작업인데

문제는 캔버스나 광목에 아크릴로의 작업과

옥사에 봉채로의 작업 등

각기 모양새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 모든 형태를 한 데로 모을 수는 없을까,

아니면 모두 나의 작업이라 할 수 있는가.

그해 겨울

입맛이 없은지 서너 달 되었을까.

애써 비빈 밥을 욱여넣다 결국 체했다.

견딜만한 편두통과 미열을 앓다가

더러 울음이 왈칵 쏟아지던 날도 있었다.

갈피를 못 잡던 그림 때문이었는지

그림 같던 내 인생 때문이었는지

내내 듣던 쓸쓸한 음악 때문이라며

나는 고작 하는 일이

조금 덜 쓸쓸한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