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le spleen de Jeju
-
작업실 한쪽 벽에 빼곡히 붙인 작품들을 정리하고 나니 무엇이 작품이고 아닌지 알게 되었다. 근래에 작업의 방향성이 변화하면서 불안 중 다행인 것은 결국 이것이 내가 하고 싶던 작업이라는 것이다. 내 뿌리와도 같은 스케치와, 20대 초반 배워왔던 빼기의 디자인, 그리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색과 본능. 이것이 결국 내가 가야 할 길 아닐까.
-
어두운 밤 아파서 낑낑대는 내게 정우가 조심스레 와서는 보드라운 두 볼을 요리조리 비비고 뽀뽀를 하고 간다. 나는 행여나 감기 바이러스가 옮을세라 아이의 입술이 나의 입에 닿지 않도록 볼을 옮겨준다. 서로의 속눈썹이, 볼이, 보드라운 솜털이 닿을 때 행복하다. 장난감을 정리해야 하니 조금 소리가 나도 이해해 달라며 속삭이듯 말하고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정리할 때도 참 행복했다.
-
며칠 전 초등학생 1학년의 반을 보내고 있는 정우에게 책상을 마련해 주기 위해 서귀포에 위치한 가구점에 들렀다. 훨씬 어릴 때에는 아이 책상의 필요성을 느끼기는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무엇보다 방을 잘 꾸며주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듯하다. 아이가 7살 가을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학교 근처의 마당이 아름다운 2층의 붉은 벽돌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1층에는 거실과 주방이, 2층에는 방이 2개라 아늑하고 남향은 아니지만 볕이 잘…
-
그와 정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숲이 가까운 어느 작은 컨테이너에 앉아 작업하다 누웠다 잠들었다 가만히 새소리를 듣기를 반복하며 벌이도 없이 변변찮은 생을 보냈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
지난 금요일 저녁,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에서 축구 경기가 있었다. 우리 가족은 7년 전 사두었던 형광빛이 강한 주황색 티셔츠를 챙겨 입고, 정우가 만든 응원용 태극기도 챙겨 경기장으로 향했다. 당연히 치킨과 햄버거도 빠질 수 없지. 경기장 중앙의 좌석보다는 골대 뒤편의 자리를 선호한다. 테이블이 있어 경기를 관람하며 먹기가 편하기 때문이고, 반대편도 생각보다 잘 보인다. 그날은 응원석 가까이에 앉게…
-
작품이 마음에 들어 팔로우하던 한 작가를 더 이상 팔로우하지 않게 되었다. 작가의 작품은 차분한 듯 차가우며 어두운 듯 부드러웠으나, 아래 달린 글에 이내 마음이 식어버렸기 때문이다. 작품 설명은 고사하고 마음을 쉬이 드러내 보이니 그 사람의 예술적 깊이와 안목은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생각과 태도 또한 작품이 아니던가.
-
푸른 밤, 하얀 형광등은 꺼지고 지구본에 옅은 노오란 불이 켜지고 나면, 요즘 이야기하자 말하는 정우다. 오늘 자신은 축구를 했는데, 그동안 엄마는 무얼 했는지 또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런저런 이야길 하다, 엄마아빠는 언제고 너를 사랑한다 말해주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정우가 조금 덜 사랑하게 되면 어쩌지?” 하고 나는 물었다. “그럼 저- 안에 있던 사랑하는 마음을…
-
이른 밤 소주잔과 맥주캔을 함께 기울이는 것,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을 자꾸만 얘기해 주는 것, 나에게만 보여주는 춤사위와 차 안에서 들려주는 선곡들. 지쳐 소파에 누워 있을 때 얼굴 근처에서 나는 냄새들.
-
오늘 아침, 다리에 밴드를 붙이는 사이 아이는 약통에서 꺼낸 손톱가위로 본인의 손톱을 깎아본다. 유치원은 이미 지각이지만 손톱이 제법 길어 깎고 가기로 했다. 아들은 두 번째 손가락의 손톱을 아주 조금 깎아 보고는 “엄마, 아직 나는 용기가 없어.”라고 말했다. 어른들은 용기가 없으면 시도치 않거나 얼버무리기 일쑤인데, 너는 용기가 없다는 말도 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구나!
-
신랑의 30년 지기 친구부부가 놀러 와 횟집에서 회를 먹던 중이었다. 갑자기 옆 테이블 부부가 정우와 친구부부의 아들에게 오천원씩 용돈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영문을 모른채 화들짝 놀라 인사를 건넸더니 하시는 말씀이 아이들이 둘이나 있어 바로 옆 테이블에 앉기 싫었는데, 예상과 달리 떠들썩하지 않게 잘 있고, 잘 먹고, 또 기다리는 동안 책을 보기까지~ 너무 예뻐서 용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