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le spleen de 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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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시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나 며칠을 보낸 뒤 나는 겨우 연필 한 자루 들고선 아름답고 한심한 꽃그림을 그린다. 인류에 위협이 될 정도로 급성장한 AI의 발전을 혹자는 사진기의 발명에 빗대기도, 또 다른 이는 뒤샹의 ‘샘’과 같은 작품이 주었던 충격에서 해답을 얻기도 하였다. 발전을 거듭해온 과학자들과는 다르게 예술가는 대게 비관적이더라는 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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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이 한 데로 모이는 것 같지 않아서 걱정이다. ‘푸른 누드와 쪽 작업 / 풍경과 패턴 / 과일 작업과 스케치’ 모두 좋아하는 작업인데, 문제는 각기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모양새를 한 데로 모을 수는 없을까, 아니면 모두 나의 작업이라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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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이 없은지 서너 달 되었을까. 애써 비빈 밥을 욱여넣다 결국 체했다. 견딜만한 편두통과 미열을 앓다가 더러 울음이 왈칵 쏟아지던 날도 있었다. 갈피를 못 잡던 그림 때문이었는지 그림 같던 내 인생 때문이었는지 내내 듣던 쓸쓸한 음악 때문이라며 나는 고작 하는 일이 조금 덜 쓸쓸한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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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롱나무 꽃피는 9월, 국립제주박물관 고으니모르홀에서 전시를 했다. 고으니모르란 고운 동산이란 뜻으로 말 그대로 둥근 공간의 통창 너머로 박물관의 야외정원이 시원히 펼쳐지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공간이다. 전시 나흘때 되던 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날 전시를 관람하러 오신 제주의 어머님께 고으니 모르 동산이 실제 오현고 앞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첫 날엔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상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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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엄마는 종종 거실에서 이젤을 펴두고 그림을 그렸다. 몇 없는 기억 중 하나 남은 것은 유화 특유의 냄새와 이젤 너머로 보였던 엄마의 발치다. 최근 나는 엄마의 오래된 나무 화구통을 물려받았다. 여고시절 내가 미술학원에 다닐 무렵 잠시 쓰기도 했던 것으로 밝고 노란끼가 도는 원목 화구통이다. 실은 물려받았다기보다는 달라고 조른 것이 맞겠다. 엄마는 큰 미련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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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학과를 반대하던, 먹고사는 일이 걱정인 어른들의 조언으로 가게 된 시각디자인과에서 나는 3학년을 끝마칠 무렵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 디자인은 나의 길이 아니구나.’ 하지만 디자인을 배움으로써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큰 얻음이 있었으니, 바로 아름다운 사물을 분별하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다양한 서체의 아름다움부터, 그리드에 의한 정렬과 색채, 클래식의 미, 미보다 앞선 실용성, 청바지에 검은 목폴라의 잡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외에도 실로 방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