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몇 년간 저의 마음을 건드린
제주의 풍경을 담아낸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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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희 두번째 개인전
2018년 11월 17(토)~26(월)
윈드스톤 갤러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광성로 272
지난 몇 년간 저의 마음을 건드린
제주의 풍경을 담아낸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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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희 두번째 개인전
2018년 11월 17(토)~26(월)
윈드스톤 갤러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광성로 272
잠시 화가로만 살고싶던 열흘이었다.
결국 나는 한 아이의 엄마이고, 아내였지만.
“귤 주세요.”
일년 전 아들의 작은 입에서 뱉어진 그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냐는 식으로 눈을 반짝이며, 몇번이고 “귤 주세요”를 외치던 아들은 이제 못하는 말이 없다. 습자지처럼 나의 말과 행동을 흡수하는 아들을 보며 내내 반성한다.
-‘슬기로운 깜빵생활’에 나왔던 ‘정경호’처럼 예쁘게 말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아 속상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귤철은 돌아왔고 주렁주렁 너무 많이 달려 나뭇가지가 휘어질 지경이다.
아들의 나무에 속 상한 열매는 떨어지고 예쁜것만 익어가길 바래본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빠는 나의 결혼 후 만 4년만에 제주에 오셨다. 고모네와 함께.
큰고모부는 일흔이 훌쩍 넘으셨고 기억속에 날카로웠던 둘째 고모부는 너무 웃긴 분이셨다. 머리숱을 뽐내며 굵은 파마를 한 곱디고운 큰고모와 작은고모가 계셨고, 막내고모는 말하길 할머니 소리는 정우에게 처음 들어보셨다고 ㅋㅋ 그도 그런것이 큰고모와 10살넘게 차이가 나니 아빠가 업어키웠다 하셨다. 아, 아빠 가족은 6남매이다.
나도 매번 까먹어 여기 적어둔다.
2018년 기준
큰고모(69세)-아빠(66)-둘째고모(64)-삼촌(63)-막내삼촌(59)-막내고모(58)
막내삼촌과 막내 고모가 헷갈린다; (추후수정예정)
아빠는 내년 이맘때쯤 삼촌네들과 같이 오시면 좋겠다 하셨다. -미세먼지만 아니면 봄에 오셔도 이쁜데 – 아무래도 함께 못온것이 내내 마음쓰인 것이리라.
부모님들 덕분에 서먹했던 사촌들과도 조금은 친해진 듯 하고 먼길 함께 여행와주셔서 고맙다.
또 고생해준 여보에게 무한한 감사를
작업을 위해 사진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몇년 전 사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가지만 앙상한 나무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알고보니 신랑이 제주에 내려 온 그해 겨울에 찍은 사진이었다. 뒤로는 한라산이 보이고 회사 앞에서 찍었다는 것으로 보아 나무는 벚나무로 추측된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한라산 앞으로 큰 건물을 짓고있어 더이상 그 풍경을 볼 수 없다.-
그림을 완성하고 꽤 지난 후에 언젠가 신랑이 내게 말했다.
사실 그 사진은 되게 차갑고 외로운 느낌을 나타낸건데 니 그림은 왜이렇게 따뜻하냐고
다시 사진을 보니 그랬다. 차가웠다.
그렇지만 그림을 그릴 당시에 나는 한라산이 내뿜던 노란 기운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그 본질이 품던 의도와는 별개로 그간 내 마음을 건드린 제주의 풍경을 담아낸 작품들을 소개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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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희 두번째 개인전
2018년 11월 17(토)~26(월)
윈드스톤 갤러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광성로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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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만나고 또 결혼을 해서 함께 살아갈 때,
이상적인 형을 그리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길인가 싶다. 하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사람을 이해하고 그의 생각이 나와 같지 않음을 존중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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尊 (높을 존), 重 (귀중할 중)
바로 이런 마음이다.
주방 수도꼭지 위로 그대의 손이 나의 것을 감싸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처음 만날때처럼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아들은 네살이나 먹었고, 결혼한지 4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나는 유년시절 그림으로는 먹고살지 못한다는 말을 종종 듣고 살았다. 엄마는 그랬다. 배운적 없는 그림솜씨가 어마어마 했지만 그걸로는 먹고 살 수 없었다. 엄마에게 그림은 아쉬움을 달래듯 그저 취미로 남았다. 그러니 우리 가족에게 그림은 사치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내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여고시절, 내가 미술학원에 다니는 것은 부모님께 적지않은 부담이었다. 물감 살 돈이라도 아끼고자 3년 내내 연필 소묘만 했다. 결국 그림으로는 돈을 벌지 못한다며 디자인과를 선택하여 20대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디자인은 나와 맞지 않다고, 이 길을 가지 않겠다 생각하며 졸업했다. 그리곤 결국 그림이라며 되돌아오던 지난날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기가 생기자 그림은 더욱 그리기 힘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듯 태교삼아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했다. 아기가 잠들면 새벽에 겨우 그린 그림을 갖고 프리마켓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림은 다시 저 멀리 달아났다. 안개속에 있는 바다와 같았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꿈같은 것이었다. 신랑과 나 그리고 아기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다행히 최근 아이가 어린이집을 오후까지 다니기 시작하면서 모든것이 변했다.
아이과 떨어져 있는 여유시간동안 나는 온전한 나의 삶과 마주했다.
그것은 그림이었다.
아들은 내일은 없는 것처럼 논다.
본받아야 된다.
으앙 애기처럼 우는데 너무 귀여워서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