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색화

천연의 재료로 염색을 하는 대신

천연색의 우리 물감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천연염색화’라는 이름 대신, ‘천연색화’라 불러 보기로 했다.

붉은 봉채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 쓰고 나면 구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장인을 찾아가 우리의 물감을 만드는 법을 배워야하나 고민이다.

2023.1.9

삼성 홈페이지를 만들던 스무살 남짓하던 젊은 청년은 이제 제법 번듯한 자신의 방이 생겼다.

업계일을 한지 21년째 되던 해다.

생각해보면 그는 편의점 알바를 하나 하더라도 허투루 하지 않던 청년이었다.

전에는 신랑이 ‘운이 좋게도’ 처음 시작한 일이 본인과 잘 맞아서 무척이나 잘 해내었다고, 때마침 시대의 흐름도 신랑의 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하면 끝까지 해내야 하는 성격탓에 여기까지 온 것일테지.

카트라이더 하나를 하더라도 사내에서 1등을 해야하는 사람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내가 게임에 문외한이라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른다.

기껏 설명을 해봐야 오구오구 정도의 반응밖에 돌아오지 않는, 칭찬을 받을줄도 할줄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조금 미안하다.

나의 일은 언제 내 편이 될지 알 수 없는데, 상한 몸을 채 돌볼 시간도 없이 출장을 떠나는 남편을 보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건강한 음식을 만드는 것, 신랑이 돌아왔을때 아늑함을 느낄 수 있도록 집을 잘 돌보는 것, 정우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 짜쯩내지 않는 것 정도. 쓰다보니 생각보다 많은걸? ㅋㅋ

무엇보다 여보! 방이 생긴것을 매우 축하해요!

엳듯던

1학년 2학기가 되면서 정우는 받아쓰기를 하게 되었다.

매주 목요일에 시험을 치르는데, 문제는 반듯하게 코팅이 된 A4지에 10개의 문장이 1급부터 16급까지 (그러니까 총 160문장) 앞뒤로 빼곡히 적혀있었다.

책의 내용에서 뽑아낸 문장 같아 보였고, 정우는 그 책을 학교에서 읽은 듯 보였다.

나는 그간 태도가 중요하다며, 올바르게 공부한다면 빵점을 맞아도 괜찮다고 몇번이나 말했다. 반대로 어중간한 태도로 백점을 맞는 것 또한 필요없는 일이라고 했다.

백점을 맞혀온 적도 있지만, 쉬운 부분에서 늘 두어개를 틀려오던 정우가 오늘은 어쩐일인지 모두 맞았다!

오늘 이 점수가 너무나 기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제 저녁 받아쓰기 연습을 할 때, 아래 두 부분을 틀렸는데 , 너무나 귀엽게 틀리는 것이 아닌가ㅠㅠ

오늘 시험에서 너무나 기쁘게도 모두 잘 써주었던 것이다!

나는 정우를 번쩍 안아 엉덩이를 팡팡 쳐주었다!

우리아들 너무 대견하네!

우주론

경북 영천에서 자란 나는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잘 알지 못한다. 게다가 당시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으니 뉴스를 보았어도 기억이 날리 없고, 나의 부모님도 작은 눈물과 짧은 탄식만이 존재했으리라,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어떤 거대한 우주론을 믿고 있다. 세월호에 이어 이번 이태원까지 참사까지 이 모든 일은 신이나 부처의 뜻도 아니요, 이 거대한 우주 안에 작은 행성의 자정작용이라 생각된다. 다양한 인간의 욕망과 이기, 또 무질서가 어우러져 일어난 결과라고.

엊저녁 정우가 내민 그림 한 장이 마음을 쿡 쑤신다.

차례차례 줄을 서야 한다는 말과 함께.

할아버지가 되면 이야기해주려나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하다보면 신랑은 가끔 예전 실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마치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이야기를 해주시듯, 신랑은 그런 일들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 해준다. 나는 그럴때면 가끔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시공간을 이동해서 젊은 신랑의 모습을 한참이고 보고싶다.

인터스텔라나 다시 보자..

작업의 방향성

작업실 한쪽 벽에 빼곡히 붙인 작품들을 정리하고 나니 무엇이 작품이고 아닌지 알게 되었다.

근래에 작업의 방향성이 크게 바뀌면서 다행인 것은 결국 이것이 내가 하고 싶던 작업이라는 것이다.

내 뿌리와도 같은 스케치와

20대 초반 배워왔던 빼기의 디자인

한국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색 그리고 내재된 본능

이 모든것이 현재 내 작업물의 결과이다.

어젯밤

어두운 밤 아파서 낑낑대는 내게 정우가 조심스레 와서는 보드라운 두 볼을 요리조리 부비고 뽀뽀를 하고 간다.

나는 행여나 바이러스가 옮을새라 아이의 입술이 나의 입에 닿지 않도록 볼을 옮겨준다.

서로의 속눈썹이, 볼이, 보드라운 솜털이 서로 닿을때 행복하다.

장난감을 정리해야 하니 조금 소리가 나도 이해해달라며 속삭이듯 말하고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정리할때도 많이 행복했다.

책상과 화장대

나의 첫 화장대는 신랑이 원해서 구매하게 되었다.

며칠 전 초등학생 1학년의 반을 보내고 있는 정우에게 책상을 마련해주기위해 서귀포에 위치한 가구점에 들렀다. 훨씬 어릴때에는 아이 책상의 필요성을 느끼기는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무엇보다 방을 잘 꾸며주고자하는 마음이 컸던 듯 하다.

아이가 7살 가을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학교 근처의 마당이 아름다운 2층의 붉은 벽돌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1층에는 거실과 주방이, 2층에는 방이 2개라 아늑하고 남향은 아니지만 볕이 잘 들어 따뜻한 집이었다. 어릴때부터 일찍이 독립한 탓에 이사와 전셋집에 지친 신랑은 이제는 정착하지 않겠나 싶었고 고심끝에 정우의 방과 어울리는 책상을 주문제작 하려 했었다. 방은 직사각형의 한변이 긴 형태라 기성 제품을 놓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주문제작이 흐지부지 되면서 결국 입학후에도 책상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정우가 제법 앉아서 연필을 잡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책상을 마련해주는 일이 더 늦어지면 안되겠다 싶었고 우리는 가구점으로 향한 것이다.

그곳은 따뜻한 느낌의 묵직한 원목으로 세련된 라인을 여럿 갖고 있는 프랜차이즈 가구점이다. 적당한 사이즈의 책상이 마침 하나 있었고 정우 또한 좋아했다. 그리고 계산을 하려는 찰나 신랑이 화장대를 사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안방의 한쪽 벽면에 쏘옥 들어갈 것 같은 앙증맞은 크기의 차분한 원목 화장대였다. 평소 화장을 잘 하지 않는 편이고, 화장대에 대한 로망같은건 없었는데 신랑은 “전부터 계속 사고싶었다.”고 말했다. 마음이 이상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책상과 화장대는 바로 배송이 왔다.

정우는 그날 책상 위에 오래 전 채집한 뿔이 멋진 (죽은)수컷 사슴벌레 를 가장 먼저 두었다.

나는 화장대의 작은 서랍에 신랑의 오랜 안경들과 젊은시절 착용했을 것 같은 은색의 묵직한 금속 시계 두 개를 곱게 놓아 두었다.

기분이 많이 좋았다.

나는 자연인이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보 그리고 정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숲이 가까운 어느 작은 컨테이너에 앉아 작업하다 누웠다 잠들었다 가만히 새소리를 들었다가 벌이도 없이 변변찮은 생을 보냈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들 덕에 이나마 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