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꽃

두어달 전 앞마당에 붓꽃을 심었다.

작업을 위해 쪽을 심을 요량으로 현관문 앞의 잡초가 무성한 작은 땅을 밭갈듯 갈았는데 -제주의 땅은 정말이지 돌 반 흙 반이라 일주일 내내 너무 힘들었다. 간혹 바위도 나온다.- 쪽만 심기 아쉬워 꽃 구근을 심었더랬다.

그러나 올 봄은 이상하게도 세찬 비바람이 강했다. 약한 잎들은 결국 꺽이고 말았고, 벼를 세우듯 나는 잎들을 모아 한데 묶어 주었는데 한번 꺽인 잎이 다시 세워질 리 만무했다. 때마침 꽃봉오리를 올린 세 꽃이 다시금 비바람에 고개를 떨구고야 말았다.

나는 조심히 꺽어와 화병에 꽂아 주었다.

애초에 붓꽃은 호주 여행 당시 추억의 꽃이었다. -시드니 플라워마켓에서 정우가 까아만 캉골 지갑을 꺼내들고 “어서 골라봐!” 하던 나의 생일 선물 꽃이다.-

화병에 툭 꽂아 식탁에 두었을 뿐인데 나는 다시 호주로 돌아간 듯 하다.

올 3월부터 받아보기 시작한 제민일보에 숨은그림찾기도 스도쿠도 있을 것만 같던 오늘 아침.

다음 여행지에서도 추억이 될 만한 꽃을 사봐야겠다.

디스커버리 퍼플과 실버리 뷰티(들여다보면 실버리 뷰티는 흰 부분이 반짝인다.)
호주 여행 당시 페트병 화병을 신랑이 만들어주었다.

미대군대

정우에게 물었다.

“정우야 미대 갈 생각 없니?”

정우가 대답했다.

“싫은데~ 군대할껀데”

굿바이 다음

서양학과를 반대하던, 먹고 사는 일이 걱정인 어른들의 조언으로 가게 된 시각디자인과에서 나는 3학년을 끝마칠 무렵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 디자인은 나의 길이 아니구나.’

하지만 디자인을 배움으로써 인생을 살아가는데에 큰 얻음이 있었으니, 바로 아름다운 사물을 분별하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다양한 서체의 아름다움부터, 그리드에 의한 정렬과 색채, 클래식의 미, 미보다 앞선 실용성, 청바지에 검은 목폴라의 잡스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외에도 실로 방대한 것들이 삶의 습관을 바꿀 정도로 내안에 깊숙이 자리해 있다.

여직 존경하는 교수님께 얻은 이러한 가르침을 이대로 놓는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용기낸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회사가 바로 ‘다음’이었다.

다음은 10년 전 홀로 제주에 내려온 까닭이었고,

많이 힘들었고,

그 안에서 신랑을 만나 참 많이도 행복했던 회사다.

그런 애증의 GMC가 이제 매각이 되어 추억이 사라진다니 꽤나 아쉽다.

천연색화

천연의 재료로 염색을 하는 대신

천연색의 우리 물감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천연염색화’라는 이름 대신, ‘천연색화’라 불러 보기로 했다.

붉은 봉채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 쓰고 나면 구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장인을 찾아가 우리의 물감을 만드는 법을 배워야하나 고민이다.

2023.1.9

삼성 홈페이지를 만들던 스무살 남짓하던 젊은 청년은 이제 제법 번듯한 자신의 방이 생겼다.

업계일을 한지 21년째 되던 해다.

생각해보면 그는 편의점 알바를 하나 하더라도 허투루 하지 않던 청년이었다.

전에는 신랑이 ‘운이 좋게도’ 처음 시작한 일이 본인과 잘 맞아서 무척이나 잘 해내었다고, 때마침 시대의 흐름도 신랑의 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하면 끝까지 해내야 하는 성격탓에 여기까지 온 것일테지.

카트라이더 하나를 하더라도 사내에서 1등을 해야하는 사람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내가 게임에 문외한이라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른다.

기껏 설명을 해봐야 오구오구 정도의 반응밖에 돌아오지 않는, 칭찬을 받을줄도 할줄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조금 미안하다.

나의 일은 언제 내 편이 될지 알 수 없는데, 상한 몸을 채 돌볼 시간도 없이 출장을 떠나는 남편을 보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건강한 음식을 만드는 것, 신랑이 돌아왔을때 아늑함을 느낄 수 있도록 집을 잘 돌보는 것, 정우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 짜쯩내지 않는 것 정도. 쓰다보니 생각보다 많은걸? ㅋㅋ

무엇보다 여보! 방이 생긴것을 매우 축하해요!

엳듯던

1학년 2학기가 되면서 정우는 받아쓰기를 하게 되었다.

매주 목요일에 시험을 치르는데, 문제는 반듯하게 코팅이 된 A4지에 10개의 문장이 1급부터 16급까지 (그러니까 총 160문장) 앞뒤로 빼곡히 적혀있었다.

책의 내용에서 뽑아낸 문장 같아 보였고, 정우는 그 책을 학교에서 읽은 듯 보였다.

나는 그간 태도가 중요하다며, 올바르게 공부한다면 빵점을 맞아도 괜찮다고 몇번이나 말했다. 반대로 어중간한 태도로 백점을 맞는 것 또한 필요없는 일이라고 했다.

백점을 맞혀온 적도 있지만, 쉬운 부분에서 늘 두어개를 틀려오던 정우가 오늘은 어쩐일인지 모두 맞았다!

오늘 이 점수가 너무나 기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제 저녁 받아쓰기 연습을 할 때, 아래 두 부분을 틀렸는데 , 너무나 귀엽게 틀리는 것이 아닌가ㅠㅠ

오늘 시험에서 너무나 기쁘게도 모두 잘 써주었던 것이다!

나는 정우를 번쩍 안아 엉덩이를 팡팡 쳐주었다!

우리아들 너무 대견하네!

우주론

경북 영천에서 자란 나는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잘 알지 못한다. 게다가 당시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으니 뉴스를 보았어도 기억이 날리 없고, 나의 부모님도 작은 눈물과 짧은 탄식만이 존재했으리라,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어떤 거대한 우주론을 믿고 있다. 세월호에 이어 이번 이태원까지 참사까지 이 모든 일은 신이나 부처의 뜻도 아니요, 이 거대한 우주 안에 작은 행성의 자정작용이라 생각된다. 다양한 인간의 욕망과 이기, 또 무질서가 어우러져 일어난 결과라고.

엊저녁 정우가 내민 그림 한 장이 마음을 쿡 쑤신다.

차례차례 줄을 서야 한다는 말과 함께.

할아버지가 되면 이야기해주려나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하다보면 신랑은 가끔 예전 실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마치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이야기를 해주시듯, 신랑은 그런 일들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 해준다. 나는 그럴때면 가끔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시공간을 이동해서 젊은 신랑의 모습을 한참이고 보고싶다.

인터스텔라나 다시 보자..